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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아빠의 영화읽기]미안해요 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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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영화평론가 김양현 목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리키들을 위한 영화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는 1980년 이후의 이른바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레이건과 대처가 열어놓은 이 물결 속에서 전 세계의 양극화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1%의 슈퍼 리치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전 세계 재화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이들의 자산은 천문학적이다. 엄청난 연봉을 받는 고액 소득자들도 늘었다. 일년에 200억을 받는 CEO, 스포츠 스타들이 즐비하다.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한정된 재화를 놓고 치열하게 다툰다.

1980년대 이후 이른바 모기지론이나 금융 파생 상품은 중산층을 무너뜨리며 저 소득자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빌린 돈으로 집을 사다보니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는다. 일반인들은 소득의 많은 부분을 빚 갚는데 써야 하고 이른바 하우스 푸어(house poor), 워킹 푸어(working poor)로 전락한다. 소득의 상당 부분을 빚 갚는데 써야 하므로 일을 하지만 가난한 자들이다.

켄 로치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병폐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주인공 리키는 은행 파산의 여파로 실직자가 되었다. 건설사가 부도가 났고 그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빚이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취업의 문은 제한적이다. 결국 그는 지입 택배 기사가 된다. 택배 수송 차량을 스스로 구입해서 물건을 배달하고 실적에 따라 수당을 받는 조건이다.

리키는 열심히 일하지만 돈을 모으기 힘들다. 택배 물건을 배달하는 밴을 할부로 샀기에 할부금을 갚아야 하고, 혹시나 배달 사고가 나면 스스로 배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키는 점점 배달량을 늘린다. 그래야 빚을 갚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늘어난 물량을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약속된 시간에 배달하기 쉽지 않고 교통 정체도 극복해야 한다. 이래저래 리키의 삶은 고단하다.

리키의 부인 에비 역시 일을 한다. 그녀는 재택 간병인 일을 한다. 하루에 6가정을 방문하여 노인들, 병자들을 돌본다. 그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이다. 문제는 한 명이라도 일정 시간을 초과하면 다음 환자를 돌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게다가 리키가 밴을 마련하기 위해 있던 소형차를 처분했기에 대중교통으로 다녀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리키와 에비는 점점 감정의 고갈을 경험한다. 택배 물건을 배송하다 만나는 고객들은 천차만별이다. 조금 늦었다고 화를 내고, 신분증을 보여달라 하면 거절한다. 집에 없는 사람도 있고,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걸어 올라가야 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고객들은 리키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들에게 리키는 단지 자신이 주문한 물건을 제 시간에 가져다 주는 기계에 불과하다. 리키의 감정이 메말라 갈 수 밖에 없다. 에비 또한 마찬가지다. 노인들, 환자들을 늘 상대하다보니 그녀의 감정이 온전하지 못하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불평하는 그녀의 고객들로 인해 에비의 인내도 바닥을 드러낸다.

힘겹게 살아가는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한다. 두 사람 다 하루종일 일하고 늦게 귀가하다보니 아이들을 제대로 챙길 수 없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다. 사춘기를 지나는 첫째 세브가 학교를 가지도 않고, 남의 물건도 훔치고, 싸움에 휘말리기도 한다. 학교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에비는 리키에게 하소연하며 대신 가 주기를 바란다. 그녀가 일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리키도 어쩔 도리가 없다. 고객의 물건을 배달해 주고 있으니 시간을 맞출 수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결국 참던 감정이 폭발한다. “마치 물에 젖은 모래 늪에 빠진 것 같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헤어나질 못해.” 에비의 하소연이 가슴에 사무친다.

켄 로치는 정치적, 경제적 해법을 논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족의 고단한 삶을 담담히 보여준다. 강도들에게 폭행 당하고 물건도 빼앗긴 리키는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밴에 오른다. 가족들은 말리지만 리키는 엑셀을 밟는다. “일 하러 가야 해. 일 하지 않으면 빚을 갚을 수 없어.” 켄 로치의 앵글이야말로 묵직한 정치적 행위다.

무엇이 문제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리키가 극중 아들 세브에게 하는 말은 진실일까?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빠처럼 된단 말이야.” 아니다. 그렇지 않다. 리키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정치 행위자들의 결정에 따른 희생자일 뿐이다. 리키가 실직자가 된 이유는 구조적으로 파산을 일으킨 정책 결정자들의 잔인한 탁상놀음 때문이다. 그러한 결정으로 막대한 수익을 앗아가는 자들의 먹이감이 된 것 뿐이다.

토마 피케티는 말한다. “정의란 한 국가에 속한 구성원 누구나 기본 재화, 즉 주거, 의료, 교육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들이 기본 생존권을 누릴 수 있게 책임지는 것이다. 합당한 조세 제도를 통해 국민이 빚더미에 앉지 않게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요, 정치의 의무다. 미안하단 말은 리키가 아니라 국가가, 정치가 해야 할 말이다.

 

켄 로치가 그린 일상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 자신이 가진 권력과 정보로 법을 바꿔가며 수십억의 반사이익을 얻을 때 나머지 일반인은 고스란히 그 피해자가 되어 리키의 운명에 처해진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이를 악물며 일하러 가지만 구조적 가난을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자. 공부를 많이 못 했다고 미안해하지 말자. 돈을 많이 못 번다고 미안해하지 말자. 대신 분노하고 외치자. 내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의 잘못이라고 외치자. 미안해해야 할 사람들은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제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너희들이라고 외치자. 너희들의 직무유기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치자. 적어도 이 땅에 리키와 같은 워킹 푸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힘차게 외치자.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It’s the Politics, Stupid!) 라고.

※본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도 보장합니다.

[김양현 목사는 제주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기독교적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기독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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